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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카사블랑카의 왈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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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러블리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11-17 20:21 조회1,8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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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이 반려견 2마리를 데려오는 날은 학원생들의 잔칫날이다. 40이 넘었지만 아직도 소녀스러운 원장님은,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 또한 무용수의 기본 덕목이라고 믿고 계신다. 나와 나리 씨도 교무실에 들어가 아이들을 쓰다듬었다. 요크셔테리어 키트리는 이제 갓 생후 1년째에, 활발하고 장난기가 많아 학원사람들의 공식 귀염둥이다. 포메라니안 감자티는 귀엽고 도도한 눈빛에 비해 다소 까칠하다. 어린아이들에게만 친절하지 성인 여자들에겐 앙칼지게 짖고, 가끔 키트리를 질투하기도 하지만 미워할 수 없다.

나리 씨가 내 손을 살짝 잡아 끌어서 다시 무용실로 나갔다. 우리 둘 뿐인 무용실에 아이들의 환호성 소리와 강아지를 어르는 소리가 문 틈새로 간간히 들려왔다. 벽에 기대어 나리 씨의 유튜브 계정에 있는 동영상을 함께 보았다. 콩쿠르 영상과 무용과 레퍼토리 영상은 물론이고 지금보다 한참 어린 나리 씨의 모습도 보였다.

“가장 오래된 게 초등학교 1학년 때 학원 발표회 영상이에요. 유튜브 계정 만든 이후로 어렸을 때 영상까지 남아 있는 것 여기다 다 올렸어요. 무용하는 사람들한테는 남는 게 공연 영상이니까요.”

나도 중학생 때부터 문예창작학과 시절까지 썼던 소설을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클라우드에 그대로 묵혀 두고 있다. 나리 씨와 차이점이 있다면 클라우드 속에 있는 소설들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이다. 블로그에도 몇 편 남겨두긴 했지만, 방문자 수가 떨어진 블로그가 검색어에 걸릴 확률은 거의 없다. 공연을 마치고 내려오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것은, 슬픈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문서화된 상태로 그대로 남아 버리면 오히려 처치곤란이기 때문이다. 나리 씨는 내 클라우드에 쌓인 소설들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소설 쓸 때의 기분을 완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지금도 내 작품을 감상하는 나리 씨의 얼굴 근육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으니 말이다. 합평 때마다 굳어있었던 것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을 따라 나도 웃고 있었다.
늦은 시간,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후 학원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야간까지 연습하는 입시생도 없는 날이라 스튜디오에서 댄스파티를 여는 것도 색다를 것 같았다.

“의상 한번 볼래요?”

자신이 그동안 모은 발레 무대의상들을 보여줬다. 부드러운 공단 재질에, 반짝거리는 펄이 허니 글레이즈드 도넛의 시럽을 떠올리게 했다. 발레복을 살살 핥아 먹으면 사르르 녹아내릴까.

“예전에 콩쿠르에서 했던 작품의상들이에요. 대여해도 되는데 부모님이 나중에 무용인생을 되돌아볼 때 좋을 것 같다며 의상실에서 직접 맞춰주셨거든요. 애들도 구경하라고 학원에 가져왔어요. 붉은색에 검은 무늬 섞인 건 에스메랄다랑 키트리 할 때 의상이고, 쨍한 파란색은 그랑파클래식…….”

다른 의상에 비해 가슴 쪽이 조금 더 넉넉해보였다. 둘 다 가슴이 성장한 후에 출전한 콩쿠르에서 선택한 작품들이라 그렇다고 했다. 그마저도 동작을 구사할 때마다 조금씩 삐져나오려 할 무렵, 그녀는 큰 대회는 물론이고 지역 주최 대회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그러고 보니까 전공할 때 콩쿠르 작품 레퍼토리 종류별로 다 해본 것 같네요. 겹치는 거 없이. 하나씩 다 해봐서 그건 정말 다행이다.”

그녀가 가장 애착을 가진 의상은 백조와 흑조 의상이었다. 의상뿐만 아니라 백조 깃털과 왕관 같은 소품도 고이 모셔두고 있었다. 백조 의상을 유심히 보던 나리 씨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파우치에서 꼬리 빗을 꺼내 손수 가르마를 타 주고, 올림머리 스펀지로 곱게 만 머리를 머리 망에 쏙 넣어주었다.

“머리도 했으니 한번 입어 봐요. 언니한테도 잘 맞을 텐데.”

처음 입어보는 발레 무대의상을 주섬주섬 껴입고 마무리로 하얀 깃털이 달린 머리띠를 하고 무용실로 나갔다. 처음 본 내 모습은 정말 낯설었다. 날 지켜보는 심사위원과 관객들도 없는데, 레오타드와 랩 스커트를 처음으로 입었을 때보다 더 떨렸다. 나리 씨가 흑조 의상을 입자 의외로 그녀에게 꼭 맞았다. 동글동글한 사슴 비슷한 인상이지만 검은 깃털 옷을 입자 이목구비에서 고혹적인 분위기가 새어나왔다.

“언니, 저 한 번도……. 가슴 때문에 불안해서 발레리노랑 파드되 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포인트 슈즈로 딛고 아라베스크로 있을 테니까 언니가 제 손 잡고 한 바퀴 돌아 줘요.”

백조와 흑조의 2인무라니. 세계 어디서도 보지 못할 진풍경이었다. 그렇게 우리들만의 특별한 춤은 밤을 새고 학원 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흑조 아다지오, 꽃의 왈츠, 오로라 솔로 바리에이션 음악…….

“이렇게 추니까 막춤 같네. 그래도 좋아요. 자유로워요.”

나도 나리 씨를 따라 어설프게나마 동작을 따라해보았다. 백조 의상을 입었으니 날갯짓 비슷하게 팔을 흔들어보였다. 뻣뻣해서 날아오를 것 같아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좋았다. <돈키호테>의 말괄량이 소녀 키트리처럼 공단 부채를 접었다가 펴는 동작을 해 보고, <호두까기 인형>의 <중국 춤> 동작을 기억나는 대로 되살리려 해 보기도 했다. 발레 여주인공 이름을 받은 원장님의 2마리 반려견처럼, 무용실 안을 뛰어다니자 땀이 줄줄 흘렀다.

“나리 씨, 지금 행복해?”
“네. 행복해요. 언니는요?”

내 꿈과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지금, 나는 정말 행복한가? 나는 결과물을 만들어 칭찬받을 수 있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속에 담은 이야기들은 많았지만 그에 비례해서 내성적인 성격 탓에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글과 그림이었다. 형태를 정확하게 캐치해서 그림으로 그려 내는 것에는 부족했기에 미술 전공을 할 수는 없었고 붓을 놓은 후에 발견한 것이 글쓰기였다. 그리고 지금, 글이랑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속옷 피팅 살롱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내 소유의 매장이 아니고 관리 권한만 부여받았을 뿐이니 자영업이라 할 수 없다. 나는 의류학이나 패션디자인 전공자도 아닐뿐더러 의상전공이랑도 교집합이 작은 것이, 사실상 이 일은 전문성을 띤 서비스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진짜 전문직 종사자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우리나라보다 속옷 산업이 더 발전한 일본 브랜드이며 가슴을 아름답게 보일 수 있게 하는 것도 기술이니까.

그러고 보면 처세술에 능한 편이 못 되는 내가 어떻게 의류업에 종사하게 되었는지 미스터리다. 소규모 개인 쇼핑몰이라면 모를까, 제법 큰 브랜드의 매장에서 일하니까 말이다. 다른 것은 없었다. 그저 고객의 몸에 맞는 속옷을 골라 주고, 휴식 때마다 탈의실에 들어가 내 몸을 살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지하상가의 아이라인 짙은 옷가게 언니들처럼 드센 성격도, 눈치가 늘 뒷북을 치는 편이었으나 다행히 신경질적인 성격은 아니고 말투도 나름 조근조근해서, 무엇보다도 빠지는 외모는 아니었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작업도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일이, 어느 새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도 축복이 아닐까.



*

내가 다리 찢기를 겨우 성공할 무렵이었다. 예약이 없는 날이라 집에서 쉬다가 몸이 근질거렸다. 학원에서 몸이라도 풀기로 했다. 학원 복도에서 무용실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구조였는데, 무용실 한켠에 카사블랑카 백합을 꽂아둔 화병이 보였다. 그리고 자유로운 몸놀림으로 춤을 추는 나리 씨, 그녀는 맨발이었다. 발레리나가 포인트 슈즈를 벗어던지다니! 언제나 단정히 쪽찌던 머리를 풀어 포니테일을 하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자유로운 몸짓으로 춤을 추고 있다니. 한 손에는 카사블랑카 백합 꽃송이를 들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의상은 다름 아닌 우리 브랜드의 웨딩속옷이었다. 하얀 뷔스티에와 이너용 랩 스커트를 입으니 무용 의상과 흡사했다. 이너스커트가 펄럭이자 햄 라인 팬티가 살짝 보였다.

“언니 왔어요? 학원 현대무용 강사님이랑 며칠 동안 머리 싸매고 안무 짰어요. 어때요?”

백합의 달달한 향기가 무용실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은 뒤에 스마트폰을 켜서 메일 어플리케이션을 열었다. 외국에서 날아온 것이라 영어 글씨가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알파벳들이 모여 긍정적인 단어를 뜻하는 군무를 추는 것은 확실히 보였다. 마지막으로 상단에 적힌 ‘버진 하트 댄스컴퍼니’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보여 준 현대무용 공연 브로슈어에는 가슴이 파인 의상을 입고 자유롭게 춤추는 무용수들이 보였다.

“저, 여기 입단할 수 있게 비자 발급 허가 났어요.”

그녀의 유튜브 계정의 구독자였던 무용단 단원은, 발레 의상 위로 드러난 그녀의 가슴을 눈여겨봤다고 한다. 이름처럼 가슴 같은 여성의 신체부위를 당당히 드러내는 춤을 춰 왔는데 그녀가 무용단의 주제의식과 잘 맞을 것 같다며 오래 연락을 해 왔다고 한다. 카사블랑카, 그녀가 창작한 안무의 제목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활짝 핀 백합 조화가 생기를 얻어 반짝 빛날 것 같았다.

“전공실기 중에서 창작발레 안무 짜는 것도 있었고, 부전공으로 현대무용도 배웠어요. 아마 저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나 봐요. 나는 백조가 될 수는 없겠구나…….”

그런 말을 하면서도 나리 씨의 얼굴에는 한 점의 그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의상이나 무대 장치만 조금 다를 뿐, 현대무용과 발레는 한 몸이다. 몸을 조이는 발레복이나 발톱을 혹사시키는 포인트 슈즈를 벗어버리고, 발레의 동작을 좀 더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현대무용이니까. 그녀는 백조를 버린 것이 아니다.

“나리 씨가 왜 백조가 아니야.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데.”


나리 씨가 한국을 떠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홍대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는 노래방에 들어가 스테이지가 있는 방을 골랐다. 요즘 여자애들이 좋아한다는 엑소나 방탄소년단의 노래는 물론이고, 알지도 못하는 노래도 제목만 예쁘고 좋아 보이면 줄줄이 예약했다. 그녀는 발레 동작은 모두 집어던지고 리듬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탬버린을 높이 들어 발끝으로 쳤다. <에스메랄다> 솔로 바리에이션의 하이라이트 동작이라고 했다. 통이 넓은 치마 사이로 속옷의 레이스가 살짝 보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발적인 집시처럼 노래방 스테이지를 날아다녔다. 인심이 후한 사장님 덕분에 서비스로 주신 4시간을 다 채우고 나왔다.

마지막 밤은 고급스럽게 보내고 싶어서, 며칠 전에 그랜드 하얏트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해 두었다. 야외수영장에 가서 비키니를 입고 활보하니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두 사람에게 쏠렸다. 아무도 안 보이는 곳으로 가서, 그녀를 안아보았다. 여자 둘의 가슴이 마찰되는 느낌이 몽글거리면서 뭔가 좋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호텔 방으로 올라갔다.

“언니, 이거요.”

나리 씨는 핸드백에서 상자를 꺼냈다. 유명 의류 브랜드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은색으로 반짝이는 천이 눈에 들어왔다.

“비자 발급받은 날에 백화점 돌아다니며 골라봤어요. 반짝이라 눈에 띄더라구요. 전에 언니 글이 백조도 흑조도 아닌 것 같았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나리 씨의 선물인 은색 원피스를 입어보았다. 딱 붙어서 몸매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한 디자인이었는데, 골반 바로 아래쪽으로 레이스 치맛단이 퍼졌다.

“예쁘다. 진짜 실버 스완 같아요.”

샴페인에 취한 우리는 금방 잠들어버렸고, 다음 날에 호텔 스위트룸의 침대에서 함께 눈을 떴다.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나리 씨가 한국을 떠나는 날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인천공항까지 가려면 서울을 벗어나 공항국도로 1시간 30분을 달려가야 한다. 나리 씨는 너무 멀고 이른 아침이라 운전하기 힘들 거라며 한차례 사양했지만, 내가 꼭 바래다주겠다며 나셨다. 1시간 30분은 작별인사를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간으로 느껴졌다. 고속도로를 한참 타는 동안 햇살이 눈에 따갑게 들어왔다. 저 멀리 영종도가 보였다. 공항 1층에서 항공권을 발급받고 캐리어를 부치는 동안 그녀와 쭉 함께 있어주었다. 3층의 출국장까지 올라가면서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언니, 잘 있어요. 그리고…….”

사랑해. 출입국심사장으로 통하는 견고한 문이 열리자, 나리 씨는 조용히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그녀의 실루엣에 아지랑이가 피는 것 같았다. 언젠가 본 발레리노 출신 포토그래퍼의 작품이 생각났다. 동작 하나하나를 몽타주 형식으로 편집한 사진인데 그녀의 선도 그렇게 퍼지고 있었다. 걸음을 떼는 발, 오므라들었다 펴지는 다리 근육, 가볍게 흔들리는 팔, 나를 보는 눈동자까지. 출국장 문이 닫혔는데도 그녀의 잔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리 씨의 몸짓과 목소리를 하나하나 머릿 속에 새겼다. 그리고 기억하기로 했다. 한때 우리 모두 무대 위의 화려한 블랙 스완을 꿈꾸었던 것을. 나도, 그리고 너도, 종이 위와 무대 위에서만큼은 키트리였고, 에스메랄다였고, 지젤이었던 것을. 블랙 스완도 화이트 스완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누구보다도 은빛으로 반짝거렸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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