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듬히 / 정현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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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팅 작성일17-11-06 12:39 조회7,904회 댓글0건본문
비스듬히
정현종 / 시인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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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으로 조금 기울어진 듯한 모습, 비스듬히. 생명은 어쩌면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무언가를 의지해 기대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사람 역시도 "사람 인人"의 한자에서 보듯이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 처럼 그렇게 기대고 의지하는 게 사람다운 사회가 아닌가 싶다. 시인이 말하듯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들에게서 따스함이 스며나온다.
정현종 시인 소개
1939년 12월 17일 서울 출생.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서울신문사 문화부 기자,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교수를 거쳐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5년 『현대문학』에 시 「여름과 겨울의 노래」 등으로 1965년 [현대문학]으로 데뷔한 정현종 시인은 이후 『60년대 사화집』(1965), 『사계(四季)』(1966) 등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했고, 1972년 첫 시집 『사물의 꿈』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초기시는 전후의 허무주의, 토착적 서정시를 극복하고, 시인의 꿈과 사물의 꿈의 긴장관계 속에서, 현실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초월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의 시는 고통/축제, 물/불, 무거움/가벼움, 슬픔/기쁨 등과 같이 상반되는 정서의 갈등과 불화를 노래하면서도 현실을 꿈으로, 고통을 기쁨으로 변형시키고자 하는 정신의 역동적 긴장을 탐구하였는데, 이러한 시적 탐구는 제2시집 『나는 별 아저씨』(1978), 제3시집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1984)까지 지속된다.
「고통의 축제」, 「공중에 떠 있는 것들 3」, 「술잔을 들며」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그러나 제3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1989)를 고비로 하여, 그는 현실과 꿈의 갈등보다는 생명현상과의 내적 교감, 자연의 경이감, 생명의 황홀감을 노래하면서 갈등보다는 화해의 세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적 관심의 변화는 제5시집 『한 꽃송이』(1992)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문명과 인공(人工)은 인간을 억압하는 반면, 자연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라는 내용의 시 「자(尺)」는 그의 시적 관심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의 시는 서정시의 전통을 혁신하고 새로운 현대시의 가능성을 개척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 밖에 『세상의 나무들』(1995), 『이슬』(1996), 『갈증이며 샘물인』(1999), 『견딜 수 없어』(2003), 『광휘의 속삭임』(2008) 등의 시집을 발간하였고 등단 50주년을 맞는 2015년, 열번째 시집 [그림자에 불타다]를 출간했다.
정현종 시인은 한국의 "재래적인 서정시의 전통을 혁신"하고 현대 시에 새로운 호흡과 육체를 만들어내온, 말 그대로 "한국 현대시가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 중 하나로 꼽히는 시인이다. 지칠 줄 모르는 시적 열정으로 생동하는 언어, 새로운 시적 영역의 가능성을 무한 확장해왔다. [그림자에 불타다]는 다양한 맥락과 의미를 가진 ‘그림자’들이 등장하여 시집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시인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헛것이며 덧없고 경계마저 흐리마리한 그림자들이지만 이러한 특성 덕분에 이들은 땅 위에 속박되지 않는다. 이 해방된 정신들은 명백한 세계 이면에 은유로서 존재하며 폭력과 소음에 대항하는 신선하고 고요한 언어로서 재탄생된다. 산업화된 시대에 속도와 효용의 논리로 생명마저 단순하게 수치화·자본화되는 세태 속에서 정현종의 그림자는 휘고 두루뭉술한, ‘비스듬한 존재’의 절실함을 우리에게 일깨우며 하얗게 불타고 있다.
시집 외에도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1974), 『숨과 꿈』(1982), 『프로스트 시선』(1973) 등을 비롯한 여러 산문집‧시론집‧번역서를 냈으며, 『고통의 축제』(1974)를 위시한 여러 권의 시선집이 있다.
수상내역으로는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얇은 슬픔이니’ 외 6편으로 연암문학상을, 1992년 ‘한 꽃송이’로 이산문학상을,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현대문학상을,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대산문학상을,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초대 미당문학상을, 이외에도 한국문학작가상, 네루다상, 경암학술상 예술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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