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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카사블랑카의 왈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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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러블리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11-17 20:07 조회3,1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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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소개해 준 발레용품점은 가로수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쇼 케이스 안 조그만 마네킹에 유아용 발레복이 인형 옷처럼 걸려 있었다. 초등학생 때에는 발레복 샤스커트가 그렇게 입고 싶었는데 내 몸은 저 옷을 입기에는 너무 자라버렸다. 나리 씨는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읽었는지 분홍색 레오타드와 하얀색 꽃무늬 랩 스커트를 추천해줬다.

“언니가 분홍색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취미로 하는 거고 아직 초보자니까, 랩 스커트로 사는 게 나을 거예요. 샤 스커트나

튜튜는 가격대가 좀 있으니까, 발레 오래 배우게 되었을 때 하나 사면 될 거예요.”
발레를 할 때 타이즈는 필수이지만 팬티스타킹에 거부감이 있으니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매장 탈의실에서 레오타드를 입고 나오기는 어째 부끄러웠기에 슈즈를 골랐다.

“언니는 완전 초보자니까 천 슈즈나 가죽 슈즈 신으시면 돼요. 드미포인 발가락을 땅에 붙이고 까치발로 선 자세.
으로.”

나 같은 경우는 신발이 금방 닳아서 하이힐 굽갈이를 다반사로 하는 편이니 아무래도 조금 더 튼튼한 가죽 슈즈가 나을 것 같았다. 그래도 포인트 슈즈 토슈즈의 정확한 명칭.
가 더 탐나는 어쩔 수 없었다. 광택이 있는 새틴으로 된 포인트 슈즈야말로 발레의 꽃이 아닐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웃집 아이와 잠깐 화해했었던 날, 그 애가 무용 연습실에 두고 왔다는 포인트 슈즈를 찾으러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익숙한 폼으로 슈즈를 신고 리본을 X자로 묶는 모습이 진짜 발레리나 같아보였다. 그 신발이 내 것이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평소에 245 신으시면 한 치수 크게 250으로 신는 게 좋아요.”
“딱 240만 되었으면 소원이 없겠어.”
“아니요, 발레를 하려면 발이 커야 유리하거든요. 그래야 포인 자세로 설 때 다리가 길어 보여요. 저도 키에 비해서 발이 큰 편인걸요.”

살집이 붙었을 무렵부터 발도 커졌는데, 여성화 사이즈가 맞는 것이 잘 없어서 늘 고민이었다. 그런데 발레하기에는 나름 좋은 발이라니. 미색 가죽 슈즈를 신고 발레리나처럼 포인을 해 보려 했지만 잘 접히지 않았다. 원체 평평한 발등인데다 온 몸에 유연성이 없으니 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도 언니 발등은 나름 도톰하네요. 포인 연습용 스틱도 있으니까 나중에 포인트 슈즈 신을 수 있을 때 한번 해 봐요.”

시동을 걸고 잠실로 가는 동안에도 하이힐 위로 솟아오른 나리 씨의 발등이 계속 눈에 띄었다. 무용학원 스튜디오에 들어가서도 방금 사 온 용품들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에 수영복을 입는 것과 뭐가 다르겠냐만은, ‘발레’라는 단어가 주는 고상하고도 고결한 어감 때문에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그녀가 탈의실에 등을 떠밀자, 거울을 등진 채로 겨우 몸에 꿰어 입고 나왔다.

“언니, 레오타드 정말 잘 어울려요!”
나리 씨는 입을 함빡 벌렸다. 물 한 방울도 없는 무용실에서 헤엄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거울 속에 보이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어려서부터 꿈꿔 왔던 옷이지만 20년이 지나서야 입을 수 있게 된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스타킹은 벗을 걸 그랬나보다. 레오타드 밖으로 가터벨트의 끈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발레복을 바니 걸 복장으로 만들 수는 없는 모양이니 랩 스커트를 그 위에 입어 그래도 원단이 얇아서 속살이 다 비치는 것이 어째 아슬아슬하다. 쫀쫀한 레오타드는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었고, 두 사람 다 안에 보정력이 좋은 누드브라를 입었기 때문에 맨가슴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형사고도 막을 수 있었다. 레오타드 사이로 살짝 보이는 가슴골을 보다가 허리에서 골반까지 몸의 선을 훑으며 내려갔다.

청소년기를 지나는 내내 혼자 속병만 나는 동안 피해의식은 점점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터놓지 못하다가, 내가 발레 수업을 듣지 못한 것은 시간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체형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부 아이들은 모두 체격이 작았다. 이웃집 아이처럼 키 자체가 작은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와 비슷하거나 큰 키여도 골격 자체가 자그마했다. 지금 그 아이들의 SNS 계정을 들어가 봐도 그때 체형이랑 비슷하다. 나는 당시 또래에 비해 키가 큰 편이었지만 어렸을 때는 아주 마른 골격이 아니었다. 성인이 되어 라인이 잡히기 전까진 체격이 조금 있어 보이는 몸이었다. 발레가 아닌 수영을 끊어 주신 엄마가 못내 원망스럽기도 했다. 게다가 초등학교 때는 자율배식대를 접수하다시피 했기에 학년이 오를수록 살도 함께 올랐다. 2차 성징이 발현되면서 살과 함께 가슴도 무럭무럭 자랐다. 가슴이 큰 사람이 몸에 지방이 많다는데 그래서일까? TV를 보면 가슴이 커도 마른 사람들이 많으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찌하여 다이어트에 성공한다 해도, 하루 종일 먹고 앉아서 공부하는 게 전부인 학생이니 다시 살이 오르기를 무한 반복했다. 어린애가 성인인 지금보다 더 먹었던 데다, 그것도 미트볼이나 탕수육 같은 고칼로리 음식만 집중해서 공략해댔으니 먹은 대로 몸이 답을 내어준 건 당연했다. 하지만 피해의식이 똬리를 튼 머리는 이상한 답을 내어놓았다. 그 애들은 동적인 무용을 하니 살이 안찌겠지만, 난 글을 쓰는 정적인 활동을 해서 그렇구나! 참으로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그냥 내가 미웠다. 어쩌면 난 부모님의 압박에 밀려 글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데 그들은 상을 받고 날아다니는 모습이 미워서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글을 쓰면서도 속으로 수없이 울었다. 고등학교 때 문예부는 내가 신청서를 내려 하자마자 사라졌으며, 부모님은 문창과 입시 과외의 존재 자체도 모르셨다. 내가 글을 쓰려고만 해도 공부부터 하라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셨다. 네가 입던 발레복, 그것이 내 옷이었어야 해. 네가 신던 발레 슈즈, 그것이 내 신발이었어야 해. 네가 다니는 예술고,  네가 받는 그런 상들까지도 전부 내 것이었어야 해. 그랬어야만 하는데…….

그래도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수능이 끝나고 시작한 다이어트는, 내 몸이 어느 정도까지 예뻐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내 골격은 살에 묻혀 있었을 뿐 결코 굵은 편이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가슴과 둔부만은 그대로 굴곡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몸에 대한 나의 집착과도 같은 열망이 준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을 더 간절히 원했더라면, 내 글은 좀 더 거침없이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땐 내 인생도, 내 글도 없이 그들이 만들어놓은 어두운 기운 속에 날 가두고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특별히 부러워하거나 경원시할만한 아이들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을 갖고, 정말 박수 받을 수 있는 일을 해내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앞일을 위해서도 더 이롭다는 것이, 그때는 왜 떠오르지 않았는지.

“언니! 왜 그렇게 굳어있어요. 활짝 웃어 봐요.”

입 꼬리는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살짝 노을이 졌다. 9살부터 겪었던 발레와의 악연. 하다못해 초등학교 때 일기에조차 그 이야기를 쓸 수 없었다. 그건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안줏거리도 못 될 일을 뭐 하러 이야기해야 하는지 조금 쑥스럽긴 했으나, 나리 씨라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모에 민감한 건 이 바닥에선 흔한 일이긴 한데, 취미로 배우는 꼬마들까지 그럴 줄은 몰랐네. 아마 선생이 그런 식으로 애들 외모 갖고 차별했을 거예요. 그러니 어린애들이 어깨에 힘 들어가서 왕비네 하녀네 하며 편 가르는 거지. 요즘 그랬다가는 지역 맘 카페 때문에 난리 나요. 학원 문 닫아야할 수도 있어요.”

오래 전, 이 학원에서도 그런 식으로 굴다가 학원을 나가야 했던 강사도 하나 있었다고 했다. 그때 아이들과는 달리, 요즘 애들은 되도 않는 외모 품평회에 동조하지 않고 당장 엄마에게 알렸다. 그 사실이 잠실 맘 카페에서 돌고 돌아 학원 운영에 치명타를 입기 전에 원장님이 발 빠르게 대처하셨다. 재빨리 강사를 갈아치우고 그 자리에 나리 씨가 들어온 것이다. 하긴, 요즘 아이엄마들이 보통 드센 것이 아니다.

“전 안 그럴 거예요. 이 가슴 때문에, 내가 춤추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쩐지 나리 씨는 연습용 포인트 슈즈를 신고서도, 비전공자인 나보다 더 어색해하는 듯했다. 그녀는 내게 발레를 가르쳐주겠다고 해 놓고, 스트레칭을 빌미삼아 옷매무새만 다듬고 있었다. 누드브라 덕분에 바스트 포인트가 그대로 노출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가슴의 실루엣도 정리되었지만 여전히 불편한 듯했다. 나도 어색하게 그녀가 하는 스트레칭을 따라 해보았다.

“위에 면 티셔츠를 안 입으면 스튜디오에선 춤을 못 추겠더라구요. 애들 가르칠 때도 꼭 티를 입고서 하는데 오늘 강의 없는 날이라 놓고 와 버렸네.”

그녀는 사무실에 들어가 가슴을 가릴 만한 것을 찾았지만 볼레로나 면 티 같은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카디건을 벗어서 나리 씨에게 둘러 주어서 가슴 실루엣이 가려지자, 발레선생님다운 폼이 나오기 시작했다.

“언니, 팔 이렇게, 아래쪽으로 동그랗게 말아요. 이게 앙 바. 팔 준비 자세에요. 어깨높이로 올리면 아나방, 팔 펴서 좌우로 벌리면 알 라 스콩드, 아까 아나방에서 머리 위로 올리면 앙 오.”
평소에 할 일이 거의 없는 자세이기에 발레리나처럼 완벽한 각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팔을 돌리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다리를 좌우로 찢어 골반 스트레칭을 할 때였다. 나리 씨는 나와 발을 맞대고 있다가 좌우로 쭉 힘을 주어 벌렸다.

“악! 나리 씨! 나 죽어!”

어렸을 때도 안 되던 다리 찢기는 성인이 된 지금 더 각도가 좁아져 있었다. 나리 씨는 장난스럽게 다리를 더 벌리려는 척을 하려다 그만두고 깔깔거렸다. 아픈 고관절 부위를 부여잡고 어쩔 줄을 모르다, 그녀가 앞뒤로 좌우로 다리를 쭉쭉 벌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초등학교 때 체육 시간, 이웃집 아이가 다리를 좌우로 찢어 스트레칭을 할 때 모든 아이들이 감탄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부러워했던 기억이 났다. 통증이 조금 가라앉자 언젠가 주워들었던 턴 아웃 자세가 기억났다. 어설프게나마 골반을 최대치로 열어 발뒤꿈치를 등맞춤해 보았다.

“아주 조금은 되네요? 거기서 다리 벌려 봐요. 그럼 2번 포지션이에요.”

덜덜 떨리는 다리 근육을 억지로 옮겼더니 기어이 자세가 흐트러졌다. 골반 근육은 더 조여져서 가라앉았던 통증이 다시 올라왔다. 1번 포지션에서 발뒤꿈치 옆쪽을 모은 3번 포지션은 그래도 할만 했다. 발을 바깥쪽으로 하고 다리를 X자로 교차한 4번 포지션과, 안쪽으로 교차한 5번 포지션은 나리 씨의 시범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언니! 스타킹 올 조금 나갔어요.”

가터벨트 끈을 다는 부분이 살짝 나가버렸고, 조금만 더 잡아당기다가는 그대로 찢어질 것 같았다. 가터벨트에서 스타킹만 벗겨 놓자 짝 잃은 끈이 달랑거린다. 그래도 편의점 팬티스타킹보다는 좋을 줄 알았는데, 스판덱스를 넣은 무용타이즈보다 덜 쫀쫀한 것은 당연했다. 나리 씨가 신은 타이즈를 잡았다 놓아보니 쭉쭉 잘 늘어났다.

“근데, 언니. 자세가 많이 굳은 것 같아요.”

나리 씨는 내 몸에서 비틀려있는 관절들을 하나하나 잡아주었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길이 몸 속의 작은 세포들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마주 보고 서서 내 어깨 높이를 봐주고 있던 그때 카디건이 그녀의 어깨에서 흘러내리자, 팔짱을 껴서 급히 가슴을 가렸다.

“괜찮아. 우리 둘 밖에 없는데, 안 가려도 돼. 편하게 있어.”
“아니요, 저는 이 가슴이 싫었어요.”

보통 여자들이라면 단박에 반박하겠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 몸에도 그런 가슴이 달려 있기에 2차 성징이 한창 발현되었을 때부터 애증의 감정을 가졌기 때문이다. 글에도 가슴을, 더 정확히 말하면 성숙한 여자의 유방을 달아주었다. 아무리 글은 가슴으로 쓰는 것이라고 해도 진짜 가슴을 달아버리면 곤란한데도 말이다.

“예무제 오디션을 볼 때였어요. 똑같은 연습복이 주어졌는데 패드가 없었어요. 다른 아이들은 밴드나 청 테이프 같은 걸로 가리면 되지만 난 그래도 티가 나잖아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따로 보겠다고 했는데,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매번 실기 수업때마다 위에 면 티 입다가 점수 깎였거든요. 그 날은 진짜 레오타드만 입고 전교생들이 다 보는 앞에서 춤춰야 했어요."

내 문창과 시절은, 그녀의 발레 인생에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 같았다. 계속 정진하고 연습하고 공부하면 실력은 늘릴 수 있다. 물론 노력하기로 마음먹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거기에 플러스, 신체조건까지 재능의 일부로 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물론 체형도 노력한다면 더 예쁘게 가꿀 수 있지만, 굴곡이 뚜렷한 체형이 아주 마른 몸이 되려면 뼈대를 바꿔야만 가능하다. 가슴 축소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문학보다 더, 엄격한 형식을 추구하는 무용계는 그녀의 가슴을 품어주지 못했다. 학원 선생님들이 끊임없이 가슴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민한 10대 소녀가 가장 버티기 힘들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였다.

“애들한테 있어서 전 그저 별종일 뿐이었어요. 그날, 오디션 볼 때 후배들이 아주 구경이 났더라구요? 저 언니 뭔데 가슴이 저러냐고요. 걔네 힘 있는 선배들에겐 설설 기던 애들이었는데, 저를 앞에 두고는 나오는 대로 막 뱉었어요.”

나리 씨의 커다란 눈에 다시 눈물방울이 맺혔다. 예술을 하는 동네에선 여리고 순진한 것을 불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로가 서로의 재능과 머릿속을 질투하는 세계이기에, 약삭빠른 성격이 아니면 버텨내기 힘들다. 나리 씨는 혼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전공생 아이들과 어색하게 섞이려는 노력조차 그만두고 마음을 닫아버렸다. 어차피 그녀의 몸은 발레계에선 ‘모난 돌’이므로 정을 맞아 쪼개질 운명이었으니까.

심플하고 여리여리한 몸으로 선을 구현해야 하는 발레리나에게 큰 가슴은 사치일 뿐이다. 연습할 때야 레오타드 위에 면 티를 입어서 대충 가리면 되지만, 무대의상은 연습복의 몇 배나 더 풍성하다. 상체는 딱 달라붙고 치마가 퍼지는 디자인이라 육감적인 몸에 걸치면 부해 보이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클래식 튜튜 의상은 그나마 몸매를 많이 드러내주니 낫지만, 로맨틱 튜튜는 다리조차 가려버린다. 게다가 레이스와 반짝거리는 액세서리, 깃털까지 달면 무대 위에서 춤보다 몸이 더 넘쳐흐를 것이다.

“그때 작품이 하필 <지젤>이었어요. 웨딩드레스 같은 옷 입고 베일 쓰고 춤추는 거 보신 적 있을 거예요. 전 2막 윌리 군무 파트였는데, 윌리 의상이 상의가 짧아서 가슴 다 드러나고, 치마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거라 다리는 다 가려지구요. 그 공연 영상 한 번도 안 틀어봤어요. 다른 애들은 마르고 길쭉한 처녀귀신인데 저만 눈 쌓인 한라산이 꽃 달고 춤추는 모양새일 거예요. 뒷말이요? 엄청 나왔죠. 어두운 무대에서 지젤이랑 미르타 윌리들의 여왕. 카리스마로 무대를 휘어잡는 배역이라 주역 못지않게 기량이 뛰어나야 한다. 키가 너무 커서 파트너를 구하기 어려운 발레리나가 주로 연기한다.
말고 저만 보였다고요.”

주역이나 군무의 리더보다 시선을 더 끌어 모은 것은 좋은 것일까. ‘저만 보였다’라는 말은 중의적이다. 군무에서 혼자만 유독 기량이 뛰어나서 돋보였다거나, 혹은 나리 씨의 가슴만 유난히 부각되었다거나. 전자는 좋은 의미의 특별함이고 후자는 별로 좋지 못한 의미의 특별함이다.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후자 쪽에 가까운 것이 자명했다.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슬픈 처녀귀신들이여, 가슴이 커서 슬픈 영혼이여.

“아냐. 나리 씨가 잘하니까 질투 나서 그랬을 걸? 근데 <백조의 호수> 군무였으면 조금이라도 괜찮았겠다, 그치? 짧은 치마라서 다리는 드러낼 수 있으니까.”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해본 말이었다. 아픈 과거를 회상하면서 입술이 쭉 나왔던 나리 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게요. 왜 지젤이었을까?”



*

아침부터 온 몸의 근육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 번도 안 해본 동작을 따라하니 뱁새 가랑이가 찢어질 만도 하다. 그래도 살롱 문을 닫을 수는 없으니 출근은 해야 했다. 나리 씨는 내 연락을 받고서 단박에 오피스텔로 달려왔다. 다행히 그녀에게도 면허증이 있어서 운전을 맡길 수 있었다.

“나리 씨도 멀리서 왔지?”
“네, B시에서 왔어요. 대학까지 나온 토박이예요.”
“나도야. A시에서 집 근처 대학 다녔어.”

서울에서 지방 출신 사람을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지역이 달라도 그렇다. 나리 씨는 인문계 여고를 다니다 중간에 예술고로 전학을 갔고 그 지역의 사립대 무용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로 왔으니까 소원 풀었죠.”

예술계통을 전공하려는 사람이 서울이나 경기 권을 벗어난 곳에서 살면 상당히 불리하다. 지방만 해도 문창과에 실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대도시인 A시에 문창과 입시학원이 없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수소문을 해보면 과외는 찾을 수야 있지만, 내신과 모의고사 점수에 혈안이 되신 부모님은 문창과 실기 과외까지 알아봐주실 여력이 없었다. 나리 씨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무용학원은 시골 동네까지도 있기는 하지만 전공 과정이 수준차이가 매우 크다. 그녀도 나도

사실 일찌감치 서울을 떠나오고 싶었다. 내가 살던 A시는 사람들이 너무 조용한 편이라 오락을 즐길 곳이 거의 없고, 나리 씨가 살던 B시는 여름에 엄청난 폭염이 밥그릇 같은 지형을 달군다는 것 이외에는 그럭저럭 살만 했다. 백화점, 문화센터, 영화관, 번화가, 하다못해 클럽까지 다 갖추고는 있었지만 특별시와 광역시가 갖는 어감은 분명 달랐다. 나 같은 경우는 친척집이 서울이라 명절마다 찾기 때문에 서울이나 우리 동네나 별 다를 것이 없다는 걸 잘 알았지만 그래도 연예인들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볼 수 있고 놀 거리와 맛집이 더 많은 곳에 살고 싶었다. 둘 다 서울권 진학에 실패했기에 대학생 때도 못 이룬 상경의 꿈을, 학업에서 벗어나서야 이루다니.

모든 예체능 전공생들이 그렇듯 예술을 평생 업으로 삼기 위해서는 실력뿐만 아니라 운도 많이 필요한데, 그 ‘운’을 얻는 정보들은 주로 서울에 몰려 있다. 우리가 더 잘났더라면 부모님은 기꺼이 서울로 이사를 감행하셨을까. 부모님의 반대를 꺾고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경기도의 예술 고등학교 문예창작학과에 편입했더라면, 아니 시간을 조금 더 되돌려 중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예고에 문창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실기과외를 받았더라면 대산청소년문학상이나 문학사상사 청소년문학상 같은 굵직한 청소년문학상을 다 휩쓸 수 있었을까? 그 수상실적을 인정받아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고 졸업하기 전에 등단하는 삶은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문학도들이 꿈꾸는 것이다.

그녀 또한 무용전공자의 필수 코스로 통하는 그런 삶을 꿈꿨을 것이다. 클래식 예술계에서는 선화 예술 중·고등학교 혹은 예원학교와 서울 예술 고등학교를 거쳐, 예술대학의 서울대라 불리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는 것을 윗길로 친다. 그 후에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하는 것, 동아무용콩쿠르나 한국발레협회 콩쿠르처럼 내로라하는 대회에서 상을 휩쓰는 것, 국립극장이나 예술의 전당 무대에 서는 것은 모든 무용인들의 꿈이다. 바가노바 발레학교, 로잔콩쿠르, 볼쇼이발레단은 너무 큰 꿈이니 우리나라에서 인정받는 딱 그만큼만이라도 살았으면 하고 말이다.

허나 우리는 반대로 서로의 전공에서 흔히 말하는 ‘보통’의 삶은 고사하고 괴상한 만큼 괴상한 값을 하며 전공생시절을 보냈었다. 누군가는 당연하다는 듯이 착착 밟는 코스를 우리도 밟고 싶었는데, 꽃길인 줄 알았던 길은 장미밭길이었다. 아름다움에 취하면서도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기가 부지기수였다. 보통 만큼만 사는 것이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던가.


문예창작학과에 다니는 동안, 졸업하면 뭐 해먹고 살 거냐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인이 박혔기에 잘 알고 있다. 무용학과는 이름만 그럴싸할 뿐 더 길이 좁다.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길은 무용단 입단이 아니면 학원 강사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체대에 무용 전공으로 입학해서 임용고시를 볼 수도 있지만 소수이고, 일부는 연예계로 진출하지만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일단 나리 씨의 체형으로는 클래식 발레단 입단은 쉽지 않았다. 컨템포러리 쪽으로 눈을 돌려봐도, 지방에는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쟁쟁한 단원들 사이에서 선발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졸업 공연 이후로 무대를 잃어버린 백조는 그대로 날개가 꺾여버렸다. 그렇다고 방에만 무기력하게 누워 있을 수는 없으니, 차선책으로 강사 자리를 알아보았다. 물론 자리가 잘 나지 않았다. 입단 오디션에 낙방하거나 해서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된 무용과 졸업생들은 그녀 말고도 많고, 그들이 대거 몰려드는 곳이 바로 무용학원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마침 나리 씨의 1년 선배가 손을 내밀어주었다. 선배가 자신의 고향인 수원에 차린 학원이었는데, 나리 씨는 단박에 승낙하고 강사가 되었다. 수강생은 많은 편이 아니었으나 일할 만은 했다. 하지만 잘 다니던 일터가 하루아침에 빚쟁이에게 넘어가버렸고, ‘손을 내밀어주었다’라는 표현에도 심각한 어폐가 생겼다. 그녀가 살롱에 발걸음이 끊긴 시기였다.

보정속옷이 사치품이 되어버린 것은 물론이고 자취방 월세를 내지 못해 방을 빼 줘야만 했다.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기에 정자동 쪽에 있는 허름한 고시원으로 잠시 자리를 옮기고 임시방편으로 편의점에 일자리를 구했다. 나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파란색과 빨간색이 섞인 편의점 조끼를 입고, 힘없는 표정으로 술이나 담배를 계산하는 백조라니! 그녀는 진짜 백조가 되어버렸다. 무대 위의 백조가 아닌, 남들이 생각하는 ‘백조’ 말이다. 급여가 조금이라도 더 센 야간 아르바이트는 만만찮았다. 만취한 손님이 뜻도 이어지지 않는 단어들을 툭툭 뱉으며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딱 봐도 어려보이는 아이들이 담배를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나리 씨가 깃털 빠진 백조의 몰골을 하고 생기를 잃어가던 어느 날, 잠실에서 무용학원을 하는 막내이모와 연락이 닿았다.

“이모가 서울로 가시고 외갓집 행사 때 말고는 만나지도 못했는데 진짜 행운이었어요. 어렸을 때 이모가 예쁘게 발레하시는 것 보고 저도 배우게 된 거거든요.”

낯선 곳에서 꿈을 갖게 해 준 사람과 해후하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것도 피가 섞인 가족과 말이다. 그녀는 다행히 가족 중에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이 있었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글 쓰는 사람이 나 혼자였다. 부모님께도 쌓인 것이 많았기에 내가 쓴 글을 보여준 적이 손에 꼽았다. 일기를 쓸 때 버벅거리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겠다고 하다니 부모님이 놀라시는 것도 당연하지만 어린 마음에는 그저 섭섭하기만 했다. 글은 제쳐두고 공부부터 하라는 말씀도 너무나 야속했다.



*

일반계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 시간, 밤은 너무 길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그 시간에 나 혼자 단식원에서 삼겹살이 당기듯 글이 고팠다. 그때 불현 듯, 예술 고등학교에 문예창작과가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알아봤더니 우리나라에 문창과가 개설된 곳은 얼마 없었다. 그것도 모두 서울이 아닌 경기도에 위치해 있었지만 기숙사가 마련되어 있어 괜찮을 것 같았다. 모의고사 성적이 나온 날, 그저 그런 등급이 찍힌 성적표를 들고 부모님께 내 계획을 말씀드려봤지만 단칼에 거절하셨다. 아직 미성년자인 딸을 혼자 경기도에 있는 학교에, 그것도 서울에서조차 2시간이나 걸리는 곳으로 보내는 것도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난 아무도 모르게 결원이 났다는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2학년이 될 때까지 연락은 오지 않았고, 결국 부모님께 폭탄발언을 했다. 지금 다니는 학교를 일단 자퇴하고 경기도의 한 예술 고등학교 문창과에 재입학하겠다고. 일단 자퇴를 시켜달라고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엄마의 고함 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야, 이 지지배야!”

나 또한 일반계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나면 정말 갈 곳이 없겠다는 생각은 마찬가지로 갖고 있었다. 일단 자퇴는 보류하고, 예술 고등학교 원서 접수 날에 근무 중인 아빠에게 SOS를 쳤다. 사무실에 있는 팩스로 원서를 보내 주면 안 되겠냐고. 아빠의 문자는 절망적이었다. 그 학교 규정이 좀 특이해서인지 팩스는 개인정보 때문에 보낼 수 없다고. 우편으로 보내는 방법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책상에 엎드려 오열하는 것 외에는. 그렇게 2년 동안의, 꿈을 위한 혁명단원 놀이도 끝이 났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때 예고를 가겠다고 싸운 나 자신도 멍청했다. 아직 생각이 여물지 못한 10대들의 글 전쟁은 얼마나 더 치열했을까. 그것도 대학 하나만 보는 아이들이니까 말이다. 대학생이 되어 생각해보니, 그때의 내 모습은 스스로 휘발유를 온 몸에 두른 채 불에 타고 있는 집에 뛰어들려 하는 것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불빛이 화려해 보인다며 아무 생각 없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결국 집 근처 대학교의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신이라도 쌓아 둘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OT 날까지 이불 속에 처박혀 나올 생각을 않았다. 하지만 글을 쓰는 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 글이 순수문단에서 원하는 글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대학 때 마지막 수업이 아직도 기억난다. 조별과제는 어그러져버리고,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소설 합평조차 망쳐버렸다. 나는 그것이 무서워 도망칠 생각밖에 하질 않았다. 퇴고를 할 힘도, 책을 손에 잡을 힘도,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위해 문예창작학과에, 이 학교에 있는 것일까. 부모님이 깨지 않은 새벽에 집을 나와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아무 지하철이나 잡아타며 할 일 없이 돌아다니다, 2호선의 신촌역에 내려 숙박업소에 장기 등록을 했다. 풍기는 이미지만 보면 고시원이 더 나을 지 모르나, 벌집 같은 방에 들어가면 머리에 곰팡이가 슬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다. 새로 리모델링했다는 여관을 하나 골랐다. 아직 어떡할지는 몰라 캐리어도 채 풀지 않은 채였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땀에 젖은 속옷을 갈아입었다.

부모님은 딸이 휴학원도 아닌 자퇴원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집을 나간 것을 아시고는 휴대폰 배터리가 폭발할 정도로 전화와 문자를 보내셨다. 물론 며칠 동안 답조차 하지 않고, 주소록은 부재중전화 목록으로 뒤덮여 오류가 날 정도였다. 내가 겨우 한 통을 받자, 예고 편입 사건 때보다 더 역성을 내셨다. 이번엔 지지배는 물론이고 더 심한 욕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난 아무 대답도 않고 통화를 마친 채, 여관방 컴퓨터로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사이트에 들어갔다. 속옷 피팅 모델. ‘평범하지 않은’ 속옷을 입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급한 대로 구한 것이기 때문에 생활비를 모으는 대로 발을 빼기로 했다. 하지만 세상과 내 머리는 호락호락 움직여주지 않았다. 유흥업소를 여러 곳 운영하는 실장이 내게도 안마방 일을 종용한 그날, 도망치듯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신촌 지하상가를 한참 배회하다가 여관방에 돌아와서 침대에 엎어졌다.

그때 캐리어 밖으로 고개를 내민 제본 상장이 보였다. 2학년 때 학과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서 당선되어 받은 상이었다. 비평 상. 당시 나는 상을 받고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소설 수업 때 2번이나 합평을 받은 것이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고등학교 때 썼던 소설을 잘못 가져갔지만 시간이 촉박해 어쩔 수 없이 합평을 받았다. 여물지 못한 소설이었기에 열에 아홉이 혹평이었으며, 실수를 만회하고자 가져간 소설조차 너무 강렬했던 이미지 탓에 반감을 가진 학우들이 많았다. 소설이 아닌 비평이라니. 상이라면 껌뻑 죽어버리는 나였지만 비평 교수님의 연락을 받고서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벤자민 버튼의 부모가 80대 노인의 몸으로 태어난 아들을 신생아실에서 처음으로 대면했을 때처럼, 그렇게 굳어 있었다. 다른 수상자들 모두 나보다 학번이 높은 선배들이었고, 교수님께서 퇴고 과정까지 도와주셨지만 속으론 울고 있었다. 연말 학술제의 시상식에서 상장을 받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고, 상금으로 계좌에 들어온 50만원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는 듯 조용히 증발해버렸다. 안 그래도 그맘때, 중고등학생 시절 실기학원을 보내주시지 않은 부모님에 대한 앙금이 좀 남아있을 때라 가족과 외식을 하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져있었던 터였다. 나를 위해 노트북을 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옷값과 밥값으로 싹 다 녹여버렸다. 어느 날 마트의 포스기에서 잔액부족 알림이 떴을 때, ATM에 체크카드를 넣고 잔액조회를 하며 통장에서 상금이 사라진 흔적을 보고 망연자실해있었다.

서울에서 신촌의 대학교들을 쭉 훑어보고 온 후, 패배의식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이건 내 것이 아니라고. 아까 본 그 대학교들, 거기 다니는 사람들처럼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만 비평을 쓸 수 있는 거야. 나는 아니야……. 연인 알브레히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광란의 춤을 추는 지젤처럼, 아니 그냥 미친년처럼 오열했다. 여관방치고 너무 차분한 인테리어의 실내에서 서러움은 더 커져만 갔다. 그 곳에서 나는 혼자였다. 방음이 너무 잘 되어있던 탓인지 옆방 소리조차 넘어 와주지 않았다. 저기 탁자 위의 컵라면처럼 불어 터져가는 패배의식을, 누군가가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 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보드라운 까만색 천으로 제본한 상장에 눈물방울이 떨어져 얼룩이 생겼다. 얼룩이 배양기 속 미생물처럼 증식해갈 무렵 문자가 하나 왔다. 엄마였다.

-지금 서울 어디니?

힘없이 신촌 쪽이라고 답을 보냈다. 엄마는 교회 저녁집회까지 빠지고 KTX 표를 끊어, 서울역에서 신촌까지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노을빛이 역광으로 비치며 엄마의 실루엣만 드러내주고 있었다. 엄마는 화를 내지도, 나를 때리지도 않은 채 그저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밥 먹으러 가자.”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는 꿈도 못 꾸고 다이어트 사발 면이나 에너지 바 같은 것들만 먹고 버텼던 터라 조그만 해장국집이 그렇게 따뜻할 수 없었다. 국물에까지 녹아든 단백질을 한달음에 섭취했다. 식사가 끝난 후, 엄마는 디저트가 먹고 싶다며 한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커피를 좋아해서 자주 타 드셨지만 카페에 가기에는 돈이 아깝다며 즐겨 찾지 않았던 엄마였다. 엄마는 항상 그랬듯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나는 메뉴를 고르러 눈을 굴리다 석류 스무디를 시켰다.

“엄마도 한번 마셔 봐. 석류가 여자한테 좋대.”
“엄만 단 거 안 좋아해. 그리고 여자애 가슴팍에 찬바람 들어올라.”

한참 넋이 빠져있던 통에 미처 몰랐었는데, 블라우스 앞섶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기함을 할 엄마는 조용히 앞을 여며 주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화답하듯 스무디를 계속 건냈다. 결국 한 모금을 맛본 엄마는 적당히 달달하고 새콤한 맛이 무르익은 석류 스무디가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디서 지냈냐고 물으니, 나는 카페테라스에서도 잘 보이는 숙박업소 건물을 가리켰다.

“여자애가, 혼자 저런 데 살면 어떡해.”

시간이 흘러 막차를 타고 A시에 내려갈 준비를 하는 엄마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았다. 다음 날 장기숙박 요금을 정산하고, 학교에 가서 정식으로 자퇴 절차를 밟았다. 아빠와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친가 식구들이 가는 동네로 갔다. 고모 소유의 상가 옥탑방이 비어서, 그곳에 내가 살기로 했다. 공무원 부모님의 든든한 울타리 속에서 화초처럼 큰 딸이 한번쯤은 독립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 내가 큰 결단을 내린 것을 처음으로 존중해주셨다. 그날 지하상가에서 발견했던, 왕뽕브라 속옷 집에 새로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했다. 내가 속옷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처음으로 느낀 날이었다.

지금은 매장이라기보다 ‘살롱’이라는 세련된 명칭을 쓰는 이곳에서 일하면서도, 잠실 쓰리룸 오피스텔 침대에 누워서도 가끔 고모 댁 옥탑방이 떠오른다. 연식이 오래 된 주택 옥상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는데, 스티로폼 상자에 손바닥 상추와 아기 고추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고 빨랫줄에는 옷이 내 속옷들은 그늘 쪽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건조대를 두고 은밀히 말렸었다. 집 뒤편에 조그마한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명절 때마다 찾았던 동네라 서울에서 가장 익숙한 곳이다. 지방의 신도시보다도 더 따뜻했던 서울 작은 동네의 풍경.


낯선 도시에 피붙이를 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정이 되는 느낌이었지만 서비스직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비틀린 치열로 10년을 살고, 수능이 끝난 뒤부터 2년 동안 교정기를 꼈던 터라 발음도 조금 샐 때였다. 무엇보다 목소리 톤부터 고쳐야 했다. 울림통이 크지 않은 내가 고객들을 의식하고 싹싹한 목소리를 내려고만 하면 비음이 섞여버렸다. 수백 번이 넘도록 과잉친절에 대한 지적을 받고 나서야 겨우 평범한 톤이 되었다. 여자들을 상대하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같은 여자조차도 여자를 다루는 법은 어렵다. 추천해 준 사이즈가 너무 크거나 혹은 작다며, 얼굴 근육 전체를 뒤틀어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흔했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며 반품한 속옷들은 바로 전날까지 입었는지 찜찜한 체취가 짙게 배어 있기도 했다.

수원 지점에 매니저로 들어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점장님과 아르바이트 생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작은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작은 지적을 받는 것만으로도 잘 움츠러들었던 나였지만, 그래도 일을 그만두거나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글 다음으로 찾은 일에서 너무 재미를 봤기 때문일까. 가끔 서점에 가거나 공모전 수상 기사들을 보면, 놓고 온 펜에 대한 갈증이 심해졌지만 다달이 계좌로 입금되는 돈에 다시 마음이 편해지기를 계속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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