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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미녀는 석류를 좋아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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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러블리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11-17 20:04 조회2,2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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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라고 했다. 우리 브랜드는 웨딩속옷 라인으로도 유명하다. 아름다운 웨딩드레스 안에 숨은 속옷은 의외로 심플한 디자인이다. 레이스 한 올 달려 있지 않은 새하얀 실크 속옷을 만져본다. 백조의 속살이 이런 느낌일까. 예비신부 역시 하얀 원피스를 입고, 긴 갈색 웨이브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머리에 꽂은 진주 핀에 새 신부의 설렘이 묻어났다. 혼전임신으로 결혼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는데 그것마저 행복한 모양이었다.

“지금이 10주인데, 식 올릴 때쯤 되면 배가 불러올 것 같아요. 거들이나 뷔스티에 같은 거 입어도 되나요? 그래도 일생에 한번뿐인 날이라 라인도 신경쓰이는데.”

“저희 브랜드에 임산부 신부님 전용 모델도 있어요. 실루엣도 정리해 주면서, 뱃속에 있는 아기까지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어요.”

피팅룸에 들어가 예비신부에게 뷔스티에 착용 법을 알려주었다. 개월 수에 따라 자라는 아기를 위해, 제법 쫀쫀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흔히 입는 속옷이 아닌 터라 입기 복잡해 보이겠지만 의외로 간단하다. 조금 긴 브래지어를 입는다는 생각으로 컵만 잘 정리해서 넣어 주고 임산부의 배 크기에 맞춰 리본을 조여 주기만 하면 된다. 프린세스 라인 드레스라고 하니 어떤 웨딩속옷을 입어도 잘 어울릴 것이다.

결제가 끝나자, 밖에서 예비신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예비신랑이 보였다. 살짝 곱슬기가 있는 머리에, 평균 정도의 키. 외까풀에 얼굴선이 굵은 게 어째 낯이 익었다. 아무리 봐도 그 녀석이 맞는 것 같았다. 그때 나랑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다른 여자의 몸에 자신의 핏줄을 심어 놓다니 믿기지 않았다. 유리문 너머 예비신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걸어가는 녀석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남녀가 자취를 감추었을 때, 페이스북을 켜고 검색창에 녀석의 이름을 쳤다 지웠다 한참을 반복했다. 흔치 않은 이름이라 그런지 사실 찾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모 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는 정보까지 뜬다. 타임라인에 주르륵 뜨는 사진들은 모두 웨딩 화보와 초음파사진들 뿐이다. 두 사람의 흔적을 쭉 훑어보다가 녀석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잘 지내?’

‘네 누나. 오랜만이에요’

‘오늘 여자 친구 데리고 우리 살롱 왔었지? 밖에서 기다리는 거 봤어.’

‘저도 누나 봤는데 바빠 보여서 따로 인사는 못 드렸네요. 여자 친구 먼저 보내고 전 아직 논현동인데 지금이라도 뵐까요?’
카페 포메그란테에서 석류 스무디를 한 잔 시키고 녀석을 기다렸다. 서류가방을 들고 손을 흔드는 녀석은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너 평범한 회사 다닐 줄은 몰랐다? 생긴 것만 범생이지, 시 쓰고 기타 치던 애가.”

똑같은 헤어스타일에서 노란 염색기만 빠지고 신입생 때부터 살짝 올드해 보이는 세미정장 스타일을 고수해와서 교수님이라는 별명으로 많이 불렸던 것이 기억난다. 신사동에 있는 회사를 다니는 지금은 조금 더 세련된 정장을 입고 있다는 것 외에는. 녀석은 메뉴판을 보고 다 석류음료뿐이라며 신기해했다. 그나마 가장 무난한 석류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서, 스트로우로 석류 알들을 건드리는 녀석을 보니 남자가 석류를 먹으면 가슴이 나온다는 속설이 떠올랐다. 그렇게 된다면 처진 가슴을 모아 주는 라인 중에서 가장 디자인이 예쁜 분홍색 레이스 브래지어를 손수 피팅해 줘야 하나. 실실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녀석의 배경화면을 채운 웨딩화보를 보자 그 생각은 접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멀쩡한 예비부부를 레즈비언 커플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혼 축하해. 애 아빠 된 것도.”

“이제 겨우 웨딩촬영만 한 거예요. 아직도 갈 길이 머네요.”

음료가 바닥을 드러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갈 만한 곳이라면 매장뿐이다. 마침 알바생은 오늘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나오지 못했다. 남자가 들어오면 안 되는 공간이지만 규칙을 잠시 어기기로 했다. 건물 뒤편 직원전용 엘리베이터에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여기 커플 속옷은 따로 안 팔죠? 허니문 가서 입고 싶은데.”

“다른 덴 몰라도 우리 매장이 금남의 구역인데 그런 게 잘도 있겠다. 니 팬티나 리폼해 줄까?”

녀석은 신기하다는 듯 사무실을 둘러보다가, 포장이 덜 된 속옷들을 보고 낯 뜨거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 이거 누나가 시화전 때 쓴 시 아녜요?”

이내 녀석의 시선은 테이블 유리 사이에 끼운 <자존심>에 머물렀다. 살짝 부끄러웠다. 학창시절 졸업앨범 속 사진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도 누나가 이런 곳에서 일할 줄은 몰랐어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녀석의 시선은 내 가슴골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단추 달린 블라우스는 언제나 시한폭탄이다. 그래, 나도 내가 이런 곳에서 일할 줄 몰랐다.


그때 녀석 또한 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와 같은 과 동아리 멤버이기도 했는데, 내가 쓴 시를 합평할 때마다 끈적거리는 시선을 보냈다. 1년 휴학을 하고 복학해서 후배들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되었을 때도 교류가 잦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한번 대화를 시작하면 주거니 받거니 잘 이어지긴 하는 편이었다. 남동생을 둔 누나들이 흔히 그렇듯, 연하남에 대한 환상이 거의 없어 선후배의 경계가 무너질 일도 없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허나 그날 녀석과 단둘이 칵테일을 마시러 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수업시간에 다른 학우가 쓴 시를 읽고 합평을 할 때 혀가 꼬여서 어물거리기만 했다. 게다가 그날 조별과제 모임조차 저녁 내내 질질 끌었지만 별 성과가 나오질 않았다. 조장 여선배는 입으론 내가 쓴 보고서의 문장이 이상하다며 한참 지적질을 하고, 눈으론 가슴 부분만 훑어보았다. 조모임이 끝나고 나니 금새 다리가 풀렸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가다 우연히 같은 동아리 여자후배를 만났다. 주점에서 소주와 황도를 시켜서 한참 수다를 떨다가, 여후배는 기숙사 통금 시간이 다 되었다며 일어섰다. 뭔가 아쉽다고 느끼던 참에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녀석이 보였다. 일행들은 녀석이 몸담고 있는 음악동아리 멤버들이라고 했다. 나보다 한 학번 아래인 녀석이 어느새 2학년이 되어 중앙동아리를 이끄는 회장이라니. 한잔 받으러 왔다는 핑계로 술자리에 합석해서 한참을 떠들다가 자리가 파하자, 녀석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칵테일 마시러 갈래요?”

이미 막차는 끊긴 지 오래였고 한창 오른 취기 때문이었을까, 고개를 끄덕인 내가 바보였다. 우리는 학교 근처의 룸 칵테일 바로 들어갔다. 바라고 해봤자 흔히 떠올리는 그런 이상한 술집은 아니고, 룸 카페처럼 생긴 곳에서 커피 대신 칵테일을 파는 정도였다. 외간 남자와 단둘이 술을 마신다는 게 좀 꺼림칙했지만 한잔만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직원이 들고 온 태블릿PC 메뉴판에는 색색의 칵테일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옥보단, 핑크 레이디, 피치 크러쉬…….

내가 고른 칵테일은 섹스 온 더 비치. 다른 뜻은 아니고, 석류에이드 색처럼 강렬한 루비색이 예뻐서 고른 것이었다. 내 입에서 ‘섹스’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녀석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미 알코올에 침수된 이성은 선후배라는 경계를 허물어버린 지 오래였다. 뭐에 홀린 듯, 서로의 칵테일을 쪽쪽 빨아먹고, 러브 샷 비슷한 포즈로 홀짝거렸다. 나랑 마주앉아 있던 녀석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놀라서 동그래진 내 눈동자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녀석은 내 입술에다 자기 입술을 가져다 댔다. 밀어 넣는 혀를 확 잇새로 잘라버리고 싶었다.

“누나, 말해봐……. 이거 진짜야? 진짜냐고.”

왜소하지 않은 성인 남자를 힘으로 이길 수 없었다. 녀석은 나를 확 눕혀버리고 내 가슴을 떡 주무르듯 만지작거렸다. 딱딱한 실리콘도 물풍선 같은 식염수 백도 느껴지지 않는, 오직 유선과 지방조직으로만 이루어진 진짜 가슴 감촉을 느끼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가락뿐이 아니다. 녀석의 단단해진 아랫도리가 배를 쿡쿡 찔러댄다.

“누나……. 오늘 나랑 같이 자자. 저어기 모텔 가자, 응?”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녀석의 낭심을 걷어차지는 못했지만 틈새를 노려 확 밀쳐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주점 네온사인이 어지럽게 켜진 대학가를 가로지르며 달렸다. 녀석이 쫓아오는 지 뒤를 돌아보며 계속 확인하다가 숨을 고르며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브래지어 끈이 덜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등 뒤가 뭔가 허전한 느낌이 계속 들었는데 녀석이 풀어 버렸나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공중화장실에 들어가 브래지어를 아예 벗어서 가방에 넣었다. 뛸 때마다 가슴이 출렁거린다. 새벽달에서 흘러나온 유리조각들이 가슴에 박히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지만 집을 향해 계속 달렸다.


팔짱을 껴서 가슴을 가렸지만, 녀석은 계속 내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맞다, 이건 그……소나기 어쩌고 하는 소설 발표할 때 입고 왔던 옷이잖아요. 와, 나이 먹어서도 이런 걸 소화할 수 있다니.”

“나이 먹긴 무슨. 이제 갓 서른이야.”

내가 그때도 이 옷을 입었던가. 안에 흰 블라우스를 받쳐 입는 회색 원피스인데, 가슴 탓에 다소 찡기고 야해져버려 손이 가지 않던 비운의 옷이었다. 가슴이 큰 여자 연예인들이 하는 대로 가슴둘레만 수선을 맡기려 했지만 시접이 없어 수선할 수도 없었다. 안에 패드가 달린 탑을 받쳐 입고 아예 민소매로 입을까 생각도 해봤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그냥 입기로 했었다. 조끼와 치마가 하나로 붙은 형태라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이 들어서 지금도 근무할 때 자주 입는다. 그건 그렇고 8년 전에 입었던 옷을 어떻게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칵테일 사건 이후로 수업에 들어가기가 더 두려워졌다. 다행히 그 며칠 동안 녀석이 보이질 않았다. 그로부터 몇 주가 흘렀다. 소설 수업 때 내 소설을 발표하는 날이 되었다. 발표 날이니만큼 좀 세련되고 예쁜 디자인의 옷을 찾다가 발견한 옷이 이 회색 원피스였다. 예나 제나 가슴이 끼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리본이 달린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어보니 나름 괜찮았다. 현관문을 나서려는 순간, 주말연속극 재방송을 보던 엄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드라마의 내용이 심각해서가 아니라 내 가슴에 시선이 꽂힌 것이었다.

“옷이 그게 뭐냐? 너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그런 옷은 160cm도 안 되는 작고 여리여리한 애들이나 입는 거야.”

“갈아입을 시간 없어! 나 오늘 발표하는 날이라고 몇 번을 말해? 그렇게 끼지도 않잖아.”

또 옛날 레퍼토리가 나오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학생이 되어서 그런 소리 들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속사포를 다다다 쏘는 엄마를 뒤로 하고, 현관문을 거칠게 닫고 나왔다. 정류장에서 버스가 바로 떠나기 직전 잡아타니 수업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큰소리를 낸 것 때문에 어째 찜찜했지만 그래도 이번에 발표할 소설은 평범해서 괜찮을 것 같았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유명한 문학작품을 오마주한 소설로, 어린 시절 첫사랑의 추억을 간직한 채 서울로 대학을 온 주인공이 동기 여자애를 소개받고, 첫사랑과 새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이었는데 중간에 소개팅녀와의 정사 장면 이외에는 전혀 걸릴 것이 없었다. 전날 조장 여선배가 내 소설을 읽어보고 어느 부분이 어때서 맘에 안 든다는 둥 자기 무리랑 뭐라뭐라 궁시렁댄 것이 생각났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하지만 세미나식 수업이기 때문에 소설 발표를 하는 사람들은 교탁에 서야 하는 것이 영 부담스러웠다. 앞으로 나간 순간, 뒷자리에서 씩 웃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합평 중간에 허튼소리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손이 떨리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뜻밖에 ‘발기’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입에 꺼낸 사람은, 내 소설을 좋게 보고 있던 다른 남자선배였다. 당황하고 뭔가 흥분되는 터라 표정 관리가 살짝 힘들긴 했지만 녀석은 다행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조장 여선배였다. 평소 합평 때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다가, 내가 작품을 발표할 때가 되자 혀에 모터를 단 듯 침을 팍팍 튀기며 말했다. 같은 조가 되기 전까진 그저 뚱뚱하고 과묵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내가 틈을 보이니 서서히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가 소설 쉼표를 세어 보니까 30개더라고요? 분량이 짧은 소설에 쉼표가 이렇게 많이 나오면 안 된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대화도 작위적이고, 가장 중요한 건 이게 소설이 아니라 썰 같다는 거예요.”

그걸 다 세어 봤냐고 황당해하는 교수님을 뒤로 하고, 조장은 두툼한 턱살에 파묻힌 메기입술을 계속 놀렸다. 여선배의 뒤를 이어, 다른 여자 동기나 후배들도 조장과 비슷한 이야기를 어조만 다르게 이야기했다. 어쩐지 이 선배와 조별과제를 하게 된 이후로, 나를 나름 잘 따르던 여자후배들과 좀 멀어진 감이 있었는데, 왜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지. 사람들의 말을 뭐라고 받아 적긴 했지만 손톱에서 덜렁거리는 손거스러미가 유난히 거슬렸다. 교수님 말씀을 마지막으로 합평이 끝났다. 소설 유인물에 저마다 코멘트를 쓴 걸 내게 가져온, 같은 조의 또 다른 여선배가 내게 말했다.

“소설 잘 봤어. 그리고 조별과제 말이야, 네가 정리해준 것 덕분에 내용 정리가 더 쉬웠던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조장에게 지적당할 때도 내 편을 들어줬었던 것이 생각났다. 교수님도 수고했다며, 그리고 소설 잘 읽었다며 칭찬해주신 덕분에 가볍게 나갈 수 있었다. 오죽 지적할 건덕지가 없으면 문장부호를 갖다가 걸고넘어지겠느냐고 웃어넘기기로 했다. 그것도 잠시, 편의점을 가기 위해 문과대학 뒤편으로 가다가 조장 무리와 마주쳤다.

“야, 강미녀. 이리 와봐.”

조장은 그날도 어김없이 후배 몇 명을 줄줄이 사탕으로 데리고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교복 입던 시절에도 겪어보지 못한 걸 대학생이 되어서야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미친, 그게 야설이지 소설이냐? 어쩐지 보고서 정리한 거 개판으로 했더라니. 맨날 야동이나 쳐보느라 조별과제도 그딴 식으로 처했냐?”

담배냄새가 확 끼쳐왔다. 조모임 장소였던 그룹 스터디룸 책상에 조장의 말보로 갑이 신경질적으로 놓여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조장의 뚱뚱한 그림자가 내 몸을 덮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조장은 여자치고 걸걸한 목소리에 어두운 피부 톤을 가진데다가 매일 시커먼 추리닝만 입고 다니는 탓에 위압감이 느껴지는 외모였다. 아무 대거리도 하지 못한 채 찌그러져 들고만 있었다.

“그리고 니 저번에 과모임할 때 신입생들한테 인사하라고 시켰다매. 야, 진짜 어이없다. 선배가 선배답게 해야지 안 그러냐?”

하다하다 없는 말까지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번 신입생들이 워낙에 많아서, 얼굴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기는 힘들 것 같으니 혹시나 인사를 못 받아주거나 해도 서운해 하지 말라고 한 적은 있어도, 누구처럼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나 뽕 찼어요~ 아주 광고를 하고 싶어서 옷도 이딴 거 골랐네? 오빠들이 네 야설 빨아주니까 기분 째지디?”

자랑을 하려면 애초에 홀복을 입었겠지요, 선배님. 조장은 이내 손에 들고 있는 라이터로 가슴을 쿡 찔렀다. 내 가슴은 패드를 넣은 것이 아님을 입증이라도 하듯, 다시 튀어 올랐다.

“뭐야, 의젖인가? 남자 꼬시고 싶어서 부모 등골까지 빼먹냐?”

엄마 뱃속에서부터 달고 나왔는데 무슨 말인가. 자연산이니까 찔러 볼테면 찔러 보라지, 하는 심산으로 가만히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남몰래 씨익 웃어 보였다. 너는 살을 빼도 그 살 가슴이 계속 남아 있을 것 같아? 착각하지 마! 아무리 찔러 봐도 안에서 터질 만한 보형물을 찾지 못하자, 서서히 흥미를 잃은 조장은 불이 사그라든 담배를 휙 던지고 자기 갈 길을 갔다. 나머지 후배들은 조장의 눈을 피해 내게 대충 목례를 하고 흩어졌다. 그들이 다 떠나자, 무엇에 홀린 듯 주소록을 뒤져 녀석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한테 뭐 할 말 없니?’

아무도 없는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 가끔 등산을 나오는 근처 주민들도 그날따라 보이지 않아 마음껏 눈물을 터뜨렸다. 꺽꺽 소리가 날 때까지 눈물을 삼키고 나서야 겨우 녀석에게서 답장이 왔다.

‘미안해요 누나.’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오늘 나 좀 보자.’

조장의 말에 악이 받쳐 녀석에게 물따귀라도 날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 몰래 봤던 야한 소설이 생각났다. 주인공 여고생이 동네 초등학생 남자아이 둘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처음엔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여고생이 가해자의 집을 찾아가 아이에게 자기 겨드랑이를 핥게 하는 등 조련시키며 복수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비현실적인 내용이지만, 비슷하게나마 복수하면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수업중인데요.’

당장이라도 녀석이 수업 받는 강의실로 쳐들어가서 드잡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소설과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발이 떨어지지가 않아 한참을 불안한 채로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수업이 끝났다는 녀석의 문자를 겨우 보고 학교에서 좀 떨어진 시내에 있는 카페로 녀석을 불러냈다. 녀석은 술이 취해 그랬다면서 되도 않는 변명만 계속 늘어놓았다. 아까 악에 막 받쳤을 땐 녀석의 얼굴에 뜨거운 마끼아토를 부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녀석이 소문을 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더 강하게 지배했다. 순간 녀석이 내 몸을 더 더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했던 소설조차 지금은 휴지조각에 불과한 게 되어버렸으니,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내 안의 여자밖에 없는 것만 같았다. 어차피 나는 야설이나 쓰는, 가슴 큰 더러운 여자일 뿐이니까.

“담배 피워 봐도 돼?”

지금도 비흡연자이지만, 그때 조장이 그렇게 피워대던 담배 맛이 문득 궁금해졌었다. 카페 흡연실에서 녀석은 연초 대신 전자담배를 내밀었다. 전자담배 중 가장 강한 것이라는데 쓰기만 했다. 설상가상 흡입을 해야 할 때 실수로 숨을 잘못 내쉬어서 니코틴 액이 가슴에 튀었다. 그걸 본 녀석의 눈이 또 흔들렸다. 흡연실을 나와 한참을 또 어색한 채로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며 앉아 있다가, 동아리 모임을 간다는 녀석을 너무 쉽게 보내줘 버렸다. 녀석의 손을 낚아채고 뒤에서 속삭였다.

“근데……. 나랑 진짜 자고 싶었냐?”

말을 뱉어 놓고도 내가 미쳤구나 싶었다. 남은 학교생활을 관 속에 파묻어버리고 싶어 작정했구나. 내 손을 확 뿌리치고 도망가는 녀석의 뒤로 다 마신 일회용 잔을 던졌다. 녀석에겐 채 미치지 못하고 가까운 곳에 잔이 툭 떨어졌다. 조장 무리가 다시 비웃는 것만 같았다. 눈물이 났다.

‘선배라면 선배답게 행동해야지, 안 그래?’

다음 날 학교에 가니 나를 보는 후배와 동기들의 눈빛이 심상찮았다. 설마, 설마. 강의실 문 앞에 도착하니, 문에 달린 유리창을 통해, 강의실 안에서 조장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뭐 대단한 것을 본 것마냥 열변을 토하는 것이 보였다. 문을 열면 안 된다. 저 멀리서 교수님의 발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들어갈 수 없었다. 강의실 옆 비상구 문을 열고 그대로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확 트인 비상계단에 뜨거운 햇살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내 인기척을 듣고 놀란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가면서 회색 깃털을 하나 떨궜다. 이카로스가 되어도 좋으니 비둘기 날개를 모아 날개를 만들어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리고 싶었다.

“누나. 저 진짜 소문 안 냈구요, 아무리 기억해봐도 그날 진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선배랑 여자애들이랑 모여서 무슨 드라마 이야기 아니면 연예인 이야기 하면서 떠들었을걸요? 그 선배랑 저랑 아무 관련 없는 사이라니까요. 그맘때 동기 남자애들도 다 군대 가버려서 나도 아싸나 마찬가지였는데. 같이 수업 들으면서도 그 선배 얼굴이랑 이름도 몰랐어요. 언제부터인가 그냥 자기 후배들한테 친한 척 좀 한 거지, 그 전 학기 때부터 존재감도 없었어요.”

녀석의 말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정말 아무 일이 없었다고는 해도,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지긋지긋했던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내가 살던 곳은 우리나라 5대도시 중 하나라고는 해도 지방은 지방인지 조금이라도 튀는 사람을 곱게 봐주지 못하는 그런 것이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특히 엄마는 교인이었기 때문에 신의 말씀과 사람들의 눈에 특히 민감해하셨다. 내가 조금이라도 튀는 행동을 할 때마다 한숨짓고, 학부모 상담을 하다 담임선생님의 입에서 아이가 특이하다는 말을 들은 날이면 회초리를 들었다. 서울권 대학진학도 실패하고 아쉬운 대로 집과 가까운 대학교를 지망해서 다니던 터라 따로 나가 살 명분도 짓지 못했다. 이때가 기회라는 생각에, 집 식탁 위에 휴학계를 냈다는 편지만 놓아두고 옷가지들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캐리어에 담긴 옷들은 8할이 속옷들이었다. 내 작은 여자들이 담긴 캐리어를 끌고 서울행 KTX에 올라탔다.


지방 도시에는 피팅모델 일을 구하기 힘들었지만, 서울이라 그런지 구인구직 사이트에 검색만 해 봐도 주르륵 떴다. 그 중 내 눈을 잡아 끈 것은 속옷 모델 구인광고였다. 초보자도 피팅 모델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속옷 피팅 모델이야 흔하니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알고 봤더니 평범한 속옷 모델이 아닌, 19금 속옷 샘플촬영 모델 일이었다. 스튜디오 실장은 처음에 내가 끼가 많고 뒤태와 가슴이 예쁘다며 추켜세워 주었다. 솔직히 어디 가서 당당하게 말 하기는 부끄러운 아르바이트였으나 하루 벌어먹고 살 돈은 받을 수 있으니까 잠깐만 하다가 정상적인 쇼핑몰 일을 하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촬영에 집중을 못한다느니 핑계를 주절주절 늘어놓다가, 입에서 키스방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평범한 포토그래퍼가 아니었고 유흥업소를 여러 곳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피팅 모델은 그럴듯한 미끼였던 것이다.

도망치듯 스튜디오를 빠져나와 신촌역 지하상가로 들어갔다. 내가 살던 도시의 시내에도 지하상가가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시내를 지나가다가 브래지어의 와이어가 빠져버리고 말았다. 가슴을 쿡쿡 찌르는 것을 참으며 지하상가로 내려갔는데, 바로 앞에 속옷점이 보였다. 큰 컵이 출시되는 유명 브랜드였다. 색색깔의 장미 사진이 프린팅 된 브래지어들은 마치 화려한 무덤을 연상케했다. 짙은 아이라이너를 칠한 여직원의 말투가 다소 무뚝뚝하긴 했지만, 처음으로 내게 맞는 속옷을 산 곳이었다. 신촌 지하상가에는 큰 패드가 달린 브래지어를 파는 속옷점 ‘빅시 따라잡기’에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그곳에서 파는 속옷의 패드는 조금 특별했다. 높이가 무려 5cm나 되는데다가, 속에는 워터오일이 들어 있어서 실제 가슴과 유사한 촉감을 갖고 있었다. 왕뽕브라인 만큼 내게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둘레와 컵이 가장 큰 속옷을 입었는데, 내가 입으니 수박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내가 왕뽕브라를 착용한 줄 알고, 구매량이 확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커다란 패드로 가슴을 키우고, 복부와 허리를 조여 주는 거들을 파는 그 곳과 나는 사실 어울리지 않았다.

매장이 한산한 틈을 타,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사이트에 접속해보았다. 그때 우연히 본 게 바로 맥시브라 피팅 살롱 아르바이트 모집 공고였다. 큰 가슴뿐만 아니라 작고 벌어진 가슴도 아름다워 보일 수 있다는 보정속옷 브랜드라고 했다. 오전에 본사 교육을 받으며 속옷을 하나하나 입어볼 때, 가슴에 와 닿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부드러운 천사의 손이 가슴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교육과정을 다 수료한 후, 드디어 수원의 한 백화점 안에 있는 매장에 수습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동안 피팅 매니저 일을 하다 논현동 매장의 점장이 될 수 있었다.


한참을 앉아 있다 보니 마감할 시간이 되었다. 이 녀석도 보내야 하니 주문 속옷 포장은 내일 아침 일찍 와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녀석은 어느 틈에 잠들어 있었다. 마치 이곳이 자기네 집 안방인 양, 소파와 한 몸이 된 듯 일어날 생각을 하질 않았다.

“여기 너희 집 아니니까 일어나. 지금 마감시간이야. 너도 들어가 봐야지.”

녀석은 눈을 살짝 떴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풀린 눈동자가 어째 불안했다. 그러다 이내 내 뒤통수를 잡고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누나……. 나랑 같이 총각파티 하면 안 될까?”

이미 예비신부와 뱃속에 아이도 만들었으면서 무슨 총각이란 말인가. 낮에 보았던 예비신부의 선한 눈망울이 다시 떠올랐다. 나보고 지금 그 유리알 같은 눈빛을 깨뜨리라는 것일까? 그리고 녀석의 페이스북 속 초음파사진 한가운데의 흰 점, 녀석이 선을 넘어버린다면 가장 문제는 뱃속에 있는 아기일 것이다. 마침 녀석의 바지 주머니에서 초음파사진이 툭 떨어졌다. 녀석은 주울 생각도 않은 채 반지까지 뺐다. 그 틈을 타 내가 멱살을 잡고, 강제로 직원용 엘리베이터에 태워 쫓아내 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클럽 가고 싶으면 저기 청담동에 많거든? 번지수 잘못 찾았다.”

녀석의 눈을 피해, 휴대폰으로 112를 눌렀다. 녀석은 눈치 채지 못한 채, 이내 나를 눕혀버리고 입을 막았다.

“소리 지르지 마, 누나.”

넷째손가락에 끼고 있던 약혼반지가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그는 내 골반 위에 올라앉아 허벅지 힘으로 나를 누르고는 혁대를 풀려고 까지 했다. 내가 계속 반항하고 소리지르자 녀석의 손 틈새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입을 가리고 있던 투박한 손이 사라지자,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여자 친구 뱃속에 있는 니 아기 생각해. 그럼 나에게도 이럴 수 없어. 내가 너 신고하면 빨간 줄 그을 수 있는 거, 그 나이 먹었으니까 알 거라고 생각해.”

여자 힘으로 아무리 반항을 해 봤자 막을 수 없으니, 녀석을 회유하기로 했다. 하지만 녀석은 이미 부성애 따위는 집어치운 지 오래인 것 같았다. 한참 드잡이를 하다가 때마침 사이렌이 울리고, 창밖으로 경광등 불빛이 비쳤다.

“XX, 대학 때는 딴 놈들한테 잘도 꼬리치더니, 왜 나한테는 튕기는 거냐?”

녀석이 육두문자를 뱉어내자 눈앞에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뺨이 화끈거렸다. 녀석은 본사에서 도착한 제품 택배박스를 멋대로 뜯은 다음에 속옷을 꺼내 나를 향해 던졌다.

“이딴 빤쓰나 브라자 장사하는 주제에…….”

아직 상황판단이 덜 된 모양인 것 같았다. 이제야 알아차렸는지, 녀석은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통해 도망치려 했다. 허나 아이디카드는 내 손에 있으니 문이 열릴 리가 없었다. 매장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녀석의 급소 부근에 발을 올리고 살살 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이힐 굽으로 확 찍어버리고 싶었으나, 예비 새신랑이기에 최대한 봐 준 것이었다.

“논현 지구대에서 나왔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직급이 꽤 되어 보이는 경관이, 실핏줄이 바짝 선 눈을 비비며 물었다. 사무실 안에서 전개되는 일들을 라이브로 들었으면서도 형식적인 물음을 던지는 태도가 썩 믿음직해 보이진 않았다. 남자에게 꼭 이런 일들을 말해야 하나 싶었지만 어떻게든 사건 해결을 해야 하니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했다.

“아, 네네. 그렇습니까? 근데 이 밤까지 뭣 하러 젊은 여자가 남자랑 단둘이 사무실에 있어요. 그것도 이런 여자 브라자 파는 매장에서요. 아이고, 남사스러워서 더는 못 있겠네.”


집에 가야 하지만 새벽 귀갓길에 녀석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라 하는 수 없이 사무실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본사에서 도착해 재입고된 속옷 택배박스를 연다. 비닐에 쌓여 얌전히 개켜 놓은 브래지어들 중 흰 나이트 브래지어를 집어 들었다. 오밀조밀한 레이스가 깃털 같다. 마치 카페 포메그란테 사장의 날개 문신을 연상케 한다. 그의 팔목에서 진짜 날개가 솟아나와, 오늘 밤 나에게 날아왔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런 기적 같은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기 마련이다. 나이트 브래지어는 튜브탑 상의를 닮은 디자인에, 가운데 가슴골이 보이는 디자인이라 만만한 브래지어처럼 보이나, 보통 브래지어와는 다르게 누워도 가슴이 퍼지지 않는다. 흩어지려는 정신을 하나로 붙잡아 둘 정도로, 부드럽지만 강렬하다. 아무 생각도 없이 잠들어 좋은 꿈을 꾸고 싶다. 가슴에서 솟아난 핏방울이 석류 알갱이 같은 루비로 변할 수 있는, 그런 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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