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풀밭은 사라지고 핏물만이 고여(채식주의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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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러블리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12-16 16:08 조회2,3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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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구권을 중심으로 브래지어 벗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데 영혜 역시 그저 있는 그대로의 가슴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여자가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부끄러운 부위인 유두를 가리기 위해서이지만 그녀에게 있어선 브래지어는 자신을 속박하는 도구일 뿐이다. 남편이나 친정식구들과 있을 때는 물론이고, 남편의 회사 간부들과 부부모임을 가졌을 때도 맨가슴으로 참석한다.
그녀가 가슴에 집착하는 것은 성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폭력적인 세상에선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이지만 젖가슴으로는 아무도 죽이거나 공격할 수 없고 누군가를 안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채식주의 때문에 남편과 갈등이 심화되었을 무렵엔 상의 탈의를 하고 생활하게 된다. 퇴근길에 남편은 영혜가 상의를 탈의하고 복도식 아파트의 문을 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허기가 진다”며 한 포대가 넘는 감자를 깎고 있었다. 심한 채식과 불면증으로 살이 빠지던 그녀는 가슴도 살이 빠지는데, 감자의 둥글고 흰 속살은 그녀의 원래 가슴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 자살기도를 하고 입원했을 때도 역시 상의를 벗고 있었는데, 그녀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젖가슴이 사라지는 것인데, 존재감을 잃고 살이 빠진 가슴을 더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
영혜에게 신체의 특이점이 하나 더 있다면 성인기가 지나서까지 몽고반점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몽고반점은 어린 아이들의 상징이고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에 흔적이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성인인 영혜에게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는 설정은, 그녀가 가족과 세상의 억압을 거부하고 태곳적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형부에게 예술적 영감으로 연결되며, 형부가 그녀의 몸에 꽃을 그려줬을 때 식물이 되고 싶은 열망이 표출된다. 부부관계에도 큰 욕구가 없었던 영혜가 작품 제작을 할 때 형부의 후배 J와 형부에게 몸을 열어주는데, 두 남자들이 몸에 꽃을 그렸을 때만 관계에 응해주었다. 도덕적인 관점으로만 보면 영혜의 행동은 불륜이며 자신을 유일하게 생각해주는 친언니를 기만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식물이 된 영혜에게는 그런 조건이 붙지 않는다. 모든 생물 중에 식물의 번식이 가장 순수하다. 아무런 욕구나 성적 충동 없이 ‘자손의 번성’이라는 원래 목적만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꽃의 암술은 벌과 나비가 묻혀오는 꽃가루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인다. 영혜도 자신이 ‘꽃’이니, 몸에 꽃을 그린 남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열어 준 것 뿐이다. 물론 남자들이 꽃을 그리지 않은 ‘동물’상태이거나 남편처럼 몸에서 고기의 냄새가 날 때는 거부한다. 그녀는 식물이기 때문에 동물과 관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폐쇄병동에 수용된 이후 영혜는 자신을 완전히 식물이라 믿게 된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며, 물과 햇빛만 있어도 살 수 있다며 곡기를 끊게 된다. 정신 병리학적으로 보면 단순히 거식증이란 단어로만 설명할 수 있지만 나무가 되는 것은 영혜에게 있어서 최후의 보루나 다름없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매일같이 문병을 오는 언니에게조차 ‘왜 죽으면 안되냐’고 반문할 정도로 피폐해져버렸다.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손으로 땅을 받치고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두 여자의 삶도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모든 음식을 거부하던 나머지 영혜는 심각한 영양 부족 상태가 되고, 큰 병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때 인혜는 산자락에서 나무들을 보고, 나뭇잎들을 ‘초록빛의 불꽃’이라 표현한다. 그것은 영혜가 마지막까지 저항한 흔적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인혜의 ‘항의하는 듯 쏘아보는’ 눈빛은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한 모든 사람들과 사회에 대한 원망의 표출이다.
5. 그 여자의 남자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모두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페미니즘 문학에선 여자들에게 민감한 문제인 시댁 이야기가 주로 등장하지만, 소설에선 시댁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친정 식구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인 것이 특이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정 또한 영혜의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닮은 듯한 남동생은 영혜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 하며, 어머니 또한 딸의 건강과 안위보다는 사위에게 보이는 처가의 이미지를 더 중시한다. 남편들 또한 자신의 아내를 집안일을 충실히 해줄 가족 구성원의 일부로만 생각한다. 처가댁 식구인 처형 혹은 처제에 대한 존중 또한 없이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채식주의자>는 유일하게 남편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된다. 나머지 두 작품의 서술자들은 작가 관찰자 시점을 유지하며 ‘그’와 ‘그녀’라는 3인칭 대명사로 나오는데, 남편은 ‘나’의 입장을 갖고 있다. 주인공 시점의 특성상 서술자의 주관적인 생각 위주로 흘러가게 되고, 여기서 남편이 영혜를 바라보는 시선이 잘 드러난다. 그는 강박적일 정도로 평범함을 고수해왔고, 아내 또한 자신이 만든 ‘평범함’의 틀에 가두려 한다. 영혜의 몸에 ‘특이하게도’ 몽고반점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남편은 아내가 어떤 취미를 갖고 좋아하는지 관심이 없다. ‘방에 틀어박힌다’라고 표현하며 아내가 읽는 책도 ‘재미없다’고만 평가한다. 남편이 평범하고자 하는 이유는 사실 내면에 자리 잡은 열등감 때문이다. 자신이 ‘패션지 카탈로그에 나오는 남자들’처럼 특별해질 수 없으니 평범한 사람이 되어야만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남편은 결혼하기 전부터 ‘특별한 여자를 부담스러워’해왔는데, 자신보다 잘난 여자를 좋게 보지 않는 것 또한 여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그릇된 남성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영혜의 ‘평범함’은 그저 자신의 콤플렉스를 상쇄시켜 주고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영혜가 채식주의를 선언하자 남편은 그녀가 평범함을 깨뜨렸다고 여기며 분노에 사로잡힌다. 아내가 충격에 빠져 멍해 있는데도 걱정보다 공포를 느끼며,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자 남편의 태도는 싹 돌변한다. 아내가 정신적으로 아파 보이는데도 남편의 관심은 온통 쓰레기봉투 속에 들어간 고기들에만 쏠려 있다. 그의 감정이 격해진 이유는 오직 하나, ‘비싼 고기를 버렸기 때문’이므로 이유조차 물어보지 않고 폭언을 한다. 사실 그 꿈을 꾸게 된 직접적인 계기에는 남편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끝까지 와이셔츠를 다려놓은 것이 없다며 욕설을 뱉으며 출근한다. 그 후로 남편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오늘부터 집에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은 남편에 대한 일말의 정도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편은 그것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하고 부부관계를 강요하며 영혜의 저항을 뿌리치고 성공(?)한 날에는 쾌감을 느끼며 아내를 계속 지배하려한다.
영혜의 아버지와 남동생 부부도 남편과 같은 방법으로 그녀를 억압한다. 영혜의 가정은 화목한 분위기와는 반대로 아버지와 남동생 위주로 흘러가는 수직적인 모습을 띤다. 전통적인 가정에서는 집안의 여자들은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부속품일 뿐이고, 영혜의 부모님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살아온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아버지는 그것을 두 딸에게까지 적용시키려 해서 갈등이 빚어졌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비위를 맞추지 못했던 둘째 딸’이란 아버지의 표현처럼, 여자에게만 유독 비위맞추기를 강요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자식을 차별하기도 한다. 남동생 역시 아버지의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여 누나를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영혜의 올케 또한 시댁 식구들을 두둔한다. 이는 우리나라 시댁문화의 문제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혼하면 남자 가족에게 흡수되는 형태를 띠며, 며느리는 집안에서 비교적 서열이 낮아 발언권이 잘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추정된다. 영혜가 자살기도를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아버지 때문이다. 겉으로는 딸의 건강을 걱정하는 척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 혼자만 고기를 먹지 않아 분위기를 깼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딸의 입에 억지로 탕수육을 쑤셔 넣으며 거의 학대나 다름없는 행동을 한다. 고분고분하게 살아오며 남편에게도 침묵으로 일관했던 영혜가 과도를 들고 손목을 그은 것은 가족에 대한 분노 표출이다.
영혜의 남편 시선에서 보면 처형 가족은 여유롭고 단란해 보이지만 인혜의 부부사이도 썩 좋지 못했다. 영혜 부부와 비슷하게 사랑보다는 때가 돼서 결혼한 것뿐이며, 인혜 남편은 아내에게 애정 또한 없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는 가정보다 예술과 자신의 영감에만 충실한 인물이다. 아내가 열심히 일해 화장품 매장을 확장시키고 새 집으로 이사하는 동안 그는 작품 활동조차 공백이나 다름없었다. 영혜의 남편이 인혜를 목소리를 듣고 성적 긴장감을 느낀 것보다 더, 자신의 처제에 대해 성욕을 품었다. 집들이 사건 때 손목을 그은 영혜를 업고 병원으로 옮기면서부터 흥분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가장 큰 계기는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영혜가 20살이 넘어서까지 몽고반점이 있다는 흘리듯 한 말에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2년 동안 찾아오지 않았던 예술적 영감이 왜 갑자기, 그것도 처제를 보고 떠올랐을까? 처음에는 채식주의자가 된 처제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겠지만, 식물로 살아가려는 그녀의 모습을 예술로 승화하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성욕에서 기인한 것이다. 영혜가 <span 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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