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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풀밭은 사라지고 핏물만이 고여(채식주의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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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러블리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6-12-16 16:09 조회2,24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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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혜의 남편 시선에서 보면 처형 가족은 여유롭고 단란해 보이지만 인혜의 부부사이도 썩 좋지 못했다. 영혜 부부와 비슷하게 사랑보다는 때가 돼서 결혼한 것뿐이며, 인혜 남편은 아내에게 애정 또한 없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는 가정보다 예술과 자신의 영감에만 충실한 인물이다. 아내가 열심히 일해 화장품 매장을 확장시키고 새 집으로 이사하는 동안 그는 작품 활동조차 공백이나 다름없었다. 영혜의 남편이 인혜를 목소리를 듣고 성적 긴장감을 느낀 것보다 더, 자신의 처제에 대해 성욕을 품었다. 집들이 사건 때 손목을 그은 영혜를 업고 병원으로 옮기면서부터 흥분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가장 큰 계기는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영혜가 20살이 넘어서까지 몽고반점이 있다는 흘리듯 한 말에 강렬한 느낌을 받는다. 2년 동안 찾아오지 않았던 예술적 영감이 왜 갑자기, 그것도 처제를 보고 떠올랐을까? 처음에는 채식주의자가 된 처제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겠지만, 식물로 살아가려는 그녀의 모습을 예술로 승화하고자 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성욕에서 기인한 것이다. 영혜가 이 되었으니, 인간인 자신의 맘대로 꺾어도 된다고 여기며 도덕적인 선을 넘어버린다. 심신미약상태인 처제를 취한 그의 행동은 인혜에게도 큰 불행으로 닥쳐온다. 오로지 아픈 동생과 어린 아들에 대한 책임감만 갖고 살아가야 하기에, 남편에 대한 배신감을 억눌러야만 하는 것이다.

    

 

 

6. 네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영혜가 채식주의를 선언하고 브래지어를 거부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채식주의자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이 붙더라도 여전히 그들의 소중한 딸이자 동생이자 아내이고, 더 나아가서 한 사람이고 여자이며 인격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채식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유별난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끝내 자살기도와 거식증으로 내몰았다. 인혜를 제외한 가족들은 영혜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긴 것이 아니라, 순종적인 딸과 착실하고 평범한 아내의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상을 수상하지 못했다면 소설의 문학성이 떨어지게 되는 것일까? 수상 사실에 관계없이 뛰어난 소설이자 작가의 소중한 작품인 것은 변함없다. 해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에 좋은 타이틀인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렇듯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타이틀에 더 관심을 갖는다. 물론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에 지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에 집착하다보면 점점 모든 것에 대해 서열을 나누게 된다. 서열은 권위주의와 폭력을 낳게 되는 근원이며 인간의 존엄성도 흐려지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에 쉽게 부여하는 타이틀 중 하나는 다수소수이다. 그것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 명제일까? 채식주의자들도 영혜처럼 비건에 가까운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상황에 따라 동물성 식품을 허용하는 사람 등 다양하다. 사람의 식성을 육식과 채식으로만 나눌 수 없는 것처럼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산다. 저마다 하나씩은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에서 원활히 어울리기 위해 평범함을 가장한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자주 다루는 사회적 약자들만 소수자가 아니고, 세상의 모든 집단과 사상을 다수와 소수로 나누게 되면 나와 내 가족 또한 소수자의 집단에 들어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소수 의견으로 여긴다. 조용히 보통 사람들처럼 살지 유난스럽다고 보는 사람도 있으며, 속된 말로 관심종자취급을 받기도 한다. 작가도 20대 초반에 채식을 했는데, 영혜의 경우보다는 덜하더라도 역시 차별 섞인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영혜가 정신병원에 수용된 것은 일반적인 시선으로 볼 때 그녀를 정상적으로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면서까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영양 치료를 받으러 큰 병원으로 옮겨진 영혜는 과연 살았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조차 무의미해 보인다. 영혜의 물음대로 우리는 왜 죽으면 안 되고 꼭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인혜의 바람과는 달리 그녀가 끝내 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슬픈 것만은 아닐 수 있다. 그녀의 소원대로 꽃이나 나무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문정희 시인은 <물을 만드는 여자>에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를 만나도 대지의 어머니가 되는 것을 느끼며 가만가만 소변을 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상은 가만가만 어루만져주기에는 너무 폭력적으로 변해버렸다. 대지의 여신이 되는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피를 봐야 하는 세상에서, 오늘도 우리는 연약해 보이는 나뭇가지로 나뭇잎이라는 불꽃을 태우며 살아간다.

 

 

 

 

 

이게 왜 대산감이 아님??ㅡㅡ 아 열딱지나네요 캬오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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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깅유님의 댓글

허깅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어제 차안에서 읽어봤습니다. 제가 평론은 기독교서적만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잘 쓰셨습니다.
이마트에서 책이 있길래 첫번째 글만 읽었었는데 뒤에도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몰랐네요..
덕분에 그 책 한 권을 다 읽은 느낌입니다.
인물들의 특성도 친절하고 자상하게 잘 설명해주시고, 본인이 느낀 점도 구체적으로 잘 서술한 것 같습니다.
 실력이 있으니 응모도 하신 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셔야 합니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중학교에서 실력좋다는 아이들이 외고나 과학고에 지원해서 들어가면 많은 아이들이 절망을 느껴 중도 자퇴합니다. 늘 잘한다 잘한다 칭찬만 받다가 막상 가보니..너무나 잘하는 아이들만 모여있으니 절망을 느낀다고합니다. 사실은 보통 아이들이 봤을때는 외고, 과학고 들어간다는 것만해도 대단한 일인데..본인만 그런 느낌을 받아 심지어 우울증에 자살까지 한다고 합니다.
러블리아님은 충분히 훌륭한 실력자이니 너무 화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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